라스베가스 : 바둑과 인생 - 배상환

January 23, 2026 by KCN

바둑은 가로 19줄, 세로 19줄이 만나는 361점 위에 누가 더 많은 집을 짓는가 하는 게임입니다. 1인용 밥상보다도 작은 바둑판 위에서 엄지손가락 손톱만한 희고 검은 두 종류의 돌을 가지고 상대방과 마주앉아 집짓기 싸움을 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바둑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에겐 바둑판이 우주보다 더 크며 바둑 속에서 인생의 모든 삶의 순간을 경험합니다.

저는 바둑 그 자체도 무척 즐기지만, 바둑용어 하나하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지혜를 얻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때로는 절망적일 때 그 용어 하나하나가 제 앞길을 환히 비추는 빛이 되기도 합니다.

바둑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바둑용어 한, 두 개 정도는 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외우고 있는 용어가 소탐대실(小貪大失)입니다. ‘작은 것을 탐내다가 큰 것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참 많은 교훈을 주는 말입니다. 작은 그 무엇이라도 움켜잡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충분한 검토 없이 섣불리 달려들었다간 큰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므로 우리의 결정이 더욱 힘이 듭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바둑용어는 한자어가 아닌 순우리말 ‘모르면 손 빼라’ 입니다. 어렵게 꼬인 바둑을 억지로 해결하려다가는 자칫 바둑 한 판 전체를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바둑판은 아직 빈 곳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이 있습니다. 얽히고 설켜 도무지 어찌 할 바를 모를 땐 다소 비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땐 손을 빼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금 혹시 내가 하는 일이나 인간관계가 너무나도 복잡하다면, 우선 마음을 비우고 관심을 딴 곳에 두고서 천천히 생각하다 보면 그토록 캄캄하고, 길이 안 보이고, 절망적이었던 것이 조금씩 길이 보이고, 신기하게도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방목팔목’(傍目八目)이란 말이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부터 이 말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방목팔목은 ‘바둑을 두는 사람보다 곁에서 보는 사람이 여덟 수 앞을 내다 볼 수 있다’ 는 말입니다. 즉, 어떤 일에 있어 당사자보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이해득실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자신의 바둑을(혹은, 자신의 인생을) 남의 바둑처럼(혹은, 남의 인생처럼) 마음을 비우고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바둑의 초급자는 자기 집 짓는데만 열중합니다. 그저 열심히 내 집은 지었지만, 바둑을 다 두고 계산해 보니 내 집보다 상대방 집이 훨씬 많습니다. ‘남의 집이 크게 보이면 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내 집을 어떻게 하면 더 지을까 하는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남의 집을 더 깰까 생각하는 사람도 바둑에서 이기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바둑을 어느 정도 두는 사람이라면 게임 중에 몇 번 나와 상대방의 집을 계산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근거로 나머지 바둑의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바둑의 성인 오청원은 ‘바둑은 조화’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혼자서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듯이 혼자서 둘 수 없는 것이 바둑입니다. 바둑의 즐거움은 상대방을 잡고 내가 이길 때 있는 것이 아니라 쫓고, 쫓기고, 이기고, 지고 하는 그 모든 과정 속에 있습니다. 아무리 고수라 하더라도 바둑에 지고서 마음속에 화가 치민다면 그는 아직 바둑의 참 정신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마음에 기쁨과 행복이 없다면 그는 결코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내면이 분열된 존재라고 합니다. ‘어떤 행동을 하는 나’와 ‘그것을 지켜보는 나’가 있어야 자기의식이 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관조하는 힘이 있을 때 자신의 현 상태에 대한 자각이 가능하고 그 분열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두는 바둑을 내가 바둑판 밖에서 바라 볼 수 있어야 하듯, 나의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내 밖에서 나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을 때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2016. 3.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