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록위마는 중국 진(秦)나라 말기, 환관 조고(趙高)와 관련된 고사성어입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우기며, 이에 동조하지 않는 신하들을 가려내 제거하기 위해 벌인 사건에서 유래된 고사성어 입니다. 황제 앞에서 분명한 거짓을 진실처럼 강요하고, 권력 앞에 침묵하거나, 거짓에 동조하는 자만 살아남는 구조를 만들어낸 사건입니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는 권력, 두려움, 침묵, 그리고 양심이라는 인간 사회의 오래된 문제가 농축되어 있습니다.
이 고사는 단순히 옛 왕조의 폭정을 비웃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더욱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지금, 사슴을 사슴이라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모두가 말이라 하니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가? 현대 사회는 고대 왕조와 달리 제도와 법, 민주적 절차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록위마가 가능했던 본질적인 조건, 곧 권력의 집중과 생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편안함을 택하려는 인간의 심리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직장에서는 상사의 명백한 잘못이‘조직의 방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하고, 사회에서는 사실보다‘분위기’와‘다수의 목소리’가 진실을 대체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문제 인물로 낙인 찍히고, 침묵이나 동조하는 사람이 현명한 처신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지록위마의 가장 큰 비극은 조고 한 사람의 악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큰 비극은 사슴임을 알면서도 말이라고 말한 수많은 신하들, 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다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거짓을 감당할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지록위마는 ‘악한 권력자’보다‘두려움에 굴복한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단지 나이가 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른은 사회적 책임과 도덕적 판단의 무게를 함께 감당하는 존재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로서, 직장에서는 선배로서, 사회에서는 시민으로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준이 됩니다. 이때 우리의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이 정도의 거짓은 넘어가도 된다”는 암묵적 허락이 우리 다음 세대에게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날 정보가 넘쳐나는 AI시대에는 지록위마의 교훈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노골적으로 사슴을 말이라고 부르기보다, 일부 사실을 과장하거나 맥락을 잘라내어 진실을 흐리게 만듭니다. 거짓은 단번에 들키지 않도록‘해석의 차이’나‘관점의 문제’라는 옷을 입고, 우리를 현혹시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어른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게 됩니다. 무엇이 사실이고 진리인지 분별하고, 불편하더라도 최소한 마음 속에서라도 사슴을 사슴이라 부를 수 있는 내적 정직함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진실을 말하는 일은 대가를 요구합니다. 관계의 불편함, 손해, 고립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록위마 앞에서 침묵한 이들을 무작정 비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사회가 무너지는 순간은 대개 모두가 거짓을 믿어서가 아니라,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때 찾아온다는 것은 역사가 인류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조고가 죽은 뒤에도 진나라는 오래가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거짓 위에 세운 질서는 결국 스스로를 지탱할 힘을 잃기 때문입니다. 지록위마는 우리에게 영웅적인 용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정직함, 최소한의 분별을 요구할 뿐입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하기 어렵다면, 사적인 자리에서라도 거짓을 거짓이라 인식하는 것, 후배나 자녀에게 왜 그것이 문제인지 설명해 주는 것, 잘못된 방향에 무조건 박수치지 않는 태도, 이것이 어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인 것입니다.
오늘의 사회에는 여전히 수많은‘사슴’과‘말’이 공존합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매일 선택해야 하고 또 선택을 합니다. 편안한 침묵을 택할 것인가? 불편한 진실을 택할 것인가? 지록위마의 이야기가 수천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특정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언어와 양심만큼은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슴을 사슴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을 때, 사회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지록위마 앞에서의 작은 정직함이 결국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살리는 가장 현실적인 용기임을, 이 오래된 고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