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가스 : 선풍기- 배상환

October 17, 2025 by KCN

저는 요즘 유난히 돌아가신 제 아버님 생각이 간절합니다. 저는 지난 주말 제가 준비한 한 행사가 있어 그 행사에 오시는 분들에게 좀 더 멋있게 보이려고 이발을 하러 갔는데, 미용실 도착이 너무 빨라 파킹장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잠시 기다렸습니다. 밀폐된 공간에 혼자 있는 자유,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유, 계획에도 없던 이 해방감. 제게는 참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 생각, 저 생각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안 들을 수도 있고, 콧노래를 부를 수도 있고, 안 부를 수도 있고, 최근 내게 못되게 했던 그 사람을 향해 큰소리로 욕을 할 수
도 있고,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고,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아하, 이게 자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멈춰있는 차 앞유리 위로 비행기가 계속해서 날아올랐습니다. 공항이 가깝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문득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비행기를 보며 아버님 생각이 났습니다. 제 아버님은 언제나 인자하셨고 너그러우셨으며 모든 일에 긍정 적이셨고 매일 매일의 생활에 만족하셨습니다. 공직에 계시다 사십 대 중반에 병으로 퇴임하신 후 평생 일을 않고 사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버님은 언제나 여유가 있으셨고 행복해 하셨습니다. 어떤 환경에도 만족해 하시는 자족의 삶을 사셨습니다. 다행히 제가 아버님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았는지 살면서 갖고 싶은 것 별로 없고, 가진것 별로 없어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저희 네 식구의 이민 계획을 처음 아버님께 말씀드렸을 땐 만류하셨지만 “아이들 때문에 ….” 그 한마디에 쉽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민을 떠나보내고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아버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전 세계인이 와 보고 싶어하는 라스베가스에 아들이 살면서 아버지 한 번 모시지 못한 아쉬움이 평생의 한이 되어 늘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곳에 오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제 손주들 의 재롱을 볼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대할 때마다 아버님 생각이 간절합니다. 저 비행기를 타고 아버님께서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결혼하고 1년쯤 뒤 아내가 무더운 7월 말에 첫 아이를 낳자 아버님께서 밀양에서 선풍기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오셨던 일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집에 선풍기 새것 두 개 있다. 집에 선풍기 두 개 있으면 뭐하노? 산모나 아이가 땀띠나면 안 된다. 내 갖다 줄 테니 사지 마라” 하시고서는 밀양역에서 열차를 타시고, 서울역에서 택시를 타시고, 태릉 입구 중화동 한독약품 뒤 제집까지 그 크고 무거운 것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택시비가 선풍기보다도 어쩌면 돈이 더 들 듯했습니다. 그 선풍기를 사용할 때마다 아버님 생각을 했었는데 이민 오면서 15년 사용하던 그 선풍기를 두고 왔습니다.


1989년 봄, 서울에 있는 한 여자대학 심리학과에서 학과 지를 발간하면서 제게 축시를 부탁해 와 썼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 시는 저의 두 번째 시집 <학교는 오늘도 안녕하다 2>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좀 쑥스럽지만, 전문을 소개합니다.

선풍기
배상환

비굴하게 긍정하고 돌아오던 날 밤
선풍기는 밤을 꼬박 새우며
열 오른 얼굴로 나를 향해
삶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아니라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댔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는 지금
선풍기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거짓 표정을 지을 수 없습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버스 창밖으로
가만히 쳐다볼 수만은 없습니다


진리가 꺾이는 순간에는 반드시
화를 내야 합니다 일어서야 합니다
감동 없는 글은 절대로 써서는 안 됩니다

금방이라도 선풍기가
삶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아니라고
고개를 막 좌우로
흔들어 댈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시 꺼내 읽어보니 대단히 선동적입니다. 젊은이들에게 분노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일어나 외칠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옳지 않은 일에 대해 손을 좌우로 흔들며 “노”라고 말하지 못하고 비굴하게 집으로 돌아와 열 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선풍기를 틀었는데, 그런데 이 선풍기가 나를 노려보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있습니다. “노” “노” 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내가 그렇게도 못했던 “노”를 선풍기는 너무 쉽게 합니다. 선풍기는 밤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무언의 “노” ‘노’를 계속합니다. 나는 살면서 과연 몇 번이나 저 선풍기처럼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당당하게 “노” 라고 대답했을까? 나를 돌아봅니다. 선풍기 앞에서는 늘 부끄럽습니다.


이제 추석도 지나고 시월입니다. 여름철 유용하게 사용했던 선풍기의 먼지를 털고 깨끗한 헝겁으로 씌워 내년 여름이 될 때까지 잘 보관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너무 깊숙이 두지 말고 가까이 눈 앞에 두고 내가 의지가 약해 비겁해질 때마다 선풍기를 보며 “노”의 용기와 담력을 배워야겠습니다. 선풍기를 생각하니 아버님이 더욱 그립습니다. (2015. 1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