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창 1:2)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그 땅에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시며, 질서(Cosmos)있는 세상으로 만드셨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다스리라”(창 1:28) 하시며 그곳을 인간에게 주셨다. 인간이 자유롭게, 풍성함을 누리며 살기를 하나님은 원하셨고, 에덴 동산은 그 출발 무대였다. 그러나 요즘의 세상은 하나님이 주신 이 선한 질서를 거부하고, 파괴하여, 다시 혼돈으로 되돌아 가는 듯 하다. 오늘날 한국과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의 혼란한 양상은 이런 생각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준다. 영적, 정신적 불안과, 경제와 정치의 양극화, 가치관 분열이 놀라운 속도로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소통 기술로 진리보다 감정을 빠르게 확산시킬 수 있고, 사실보다 왜곡도 쉽게 가능케 한다. SNS에서의 폭로 문화와 ‘캔슬(cancel) 문화’, 그리고 그로 인한 감정적 여론 선동은 양 진영으로 갈라지게 하고, 정죄, 비난, 매도, 오해가 난무한다. 공격이 방어를 위한 선택이 되고, 진실보다 여론이 더 무섭다.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는 말씀을 상기해야 할 때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미 이러한 사회가 어떻게 되는 지 그 결과를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정의를 표방한 인민재판은 공포와 침묵의 문화를 낳았다. 고발과 정죄, 처단으로 좋은 사회를 만든다며 시작했던 문화혁명은 많은 생명을 희생 시켰으며, 교육과 가정, 신앙과 사상을 붕괴시켰다. 킬링필드 역시 ‘정의를 위한다는 비판’의 명분 아래, 나라는 무너져 버렸다. 후에 드러난 사실은 권력자의 지위 강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인민은 혼돈, 공허, 흑암 속에서, 억압과 빈곤으로 억제 받는 것이다. 사람들이 진리로 자유케 되지 못하도록 결박하여, 공포로 통제하는 체제인 것이 증명되었다.
예수님께서 이런 세상에 오셔서 억압받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혼란한 세상의 새창조를 시작하셨다. 스스로 의롭다 라 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고 선언하신 것은 정죄와 억압을 하는 자들도 정작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음한 여인을 끌어와 예수를 시험하던 무리에게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하셨을 때, 그 자신들 역시 심판의 대상인 것을 깨닫고, 돌을 내려놓았다. 정죄와 심판으로 서로 죽이는 어두움의 권세를 제압한 것이다. 교회에서도 진리 안에 자유롭게 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 정죄와 비판의 분위기가 형성되면 서로가 서로를 방어하게 되고, 가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신앙은 왜곡되고, 외식이 믿음처럼 착각 되면서 회심과 치유, 구원과 성숙의 열매가 나타나기 어렵다. 이런 현상 때문인지, 김형석 교수는 교회가 진리보다 교리 만 가르치기에, 사회로부터 외면을 받게 되었다 고 지적했다. 우리가 던진 돌은 언제든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다. 인간은 서로를 온전히 알지 못하고, 모두 연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13) 고 경고했다. 서로를 멸망시키는 악한 고리를 끊으며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일은 긍휼히 여김으로 가능하다. 긍휼 없는 마음에서 정죄와 심판의 행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마 5:7) 이라 하셨다. 긍휼은 단지 감정적 연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열어 진리를 움직여서 영접하게 하기 때문이다. 긍휼을 통해 진리 안에 자유 하게 된 개인들이 회심하여, 모이는 공동체가 빛과 소금의 교회가 된다. 그들이 사회 안으로 들어가, 긍휼의 문화를 세상 속으로 번지게 할 때 진리가 더욱 힘 있게 확산 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이 지역의 한인들은 그래도 착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 글의 톤이 좀 미안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긍휼로 묶임이 풀리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진리로 자유 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