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소찬(尸位素餐) - 이글리버 한인침례교회 이홍래 목사

December 10, 2025 by KCN

2025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를 맞이해, 우리 고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중국 고서 왕길전(王吉傳)에 등장하는 사자성어인 ‘시위소찬(尸位素餐)’이 생각납니다.‘시(尸)’는 시체처럼 움직이지 않는 존재를,‘위(位)’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즉,‘자리만 차지한 채 아무런 일도 기여도 하지 않으며, 헛되이 밥만 먹는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게으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방기한 지도자를 날카롭게 고발하는 말입니다. 한 지도자가 자기의 본분을 성실하게 담당하기 보다는 그 지위를 이용해 사리사욕의 취한 결과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국가 최고지도자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도 이 고사성어가 생각나는 장면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리더십은 과거 어느 때보다 높은 기준을 요구받습니다.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사회는 더욱 다양하고 복잡해 졌습니다. 조직의 이해관계는 다양해졌고, 작은 결정 하나가 미치는 영향도 커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지도자들은 여전히 시대 변화에 뒤처진 채 자기 자리만 보존하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직책의 권위는 누리지만, 역할의 책임을 감당하는 일에는 소극적입니다. 회의 자리에서는 큰 그림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문제를 외면하고, 조직 구성원들의 목소리보다는 자기의 게으름을 포장하기 급급합니다. 이런 모습은 결국 조직의 활력을 잃게 만들고, 구성원들로 하여금‘우리 지도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회의감을 갖게 만듭니다.


정치 영역에서도 시위소찬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시민들은 투표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고, 그들에게 공동체의 미래를 위임합니다. 그러나 일부 정치 지도자들은 그 신뢰를 별다른 고민 없이 소비하며, 자기 보신과 정파적 이익에만 몰두합니다. 또한 그들은 위임받은 권력으로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사회의 약자들이 외치는 절규는 사욕과 정쟁 속에 쉽게 묻혀버립니다. 민생을 위한 정책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국민들은 마치 자기 목소리가 공허한 벽에 흡수되는 듯한 답답함을 느낍니다. 이 역시 시체처럼 자리에만 앉아 있는 지도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기업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최고 경영자가 혁신과 도약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변화의 책임을 중간 관리자에게 떠넘기고, 본인은 회의실과 행사장에서 상징적인 역할만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직원들은 회사의 미래를 위해 값진 노력을 쏟아붓지만, 정작 리더는 현실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외부의 화려한 수사에만 의존하려 합니다. 이런 조직에서는 결국 혁신이 정체되고, 구성원들은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구성원들의 지치고 허탈한 얼굴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 지도자의 그림자를 고스란히 반영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위소찬의 문제는 단순히 어떤 개인의 무능을 비판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리더십의 책임은 주어진 자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가 왜 존재하는지를 이해하는데 있습니다. 지도자는 권위의 중심에 서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책임의 첫 번째 자리에 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리에 걸맞은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그 자리는 오히려 공동체의 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위소찬이라는 사자성어는“지도자가 책무를 소홀히 할 때 공동체 전체가 위기를 맞는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리더십의 본질은‘자리를 유지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 자리를 사용해 누구를 살리고 어떻게 발전을 도모하는가’ 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조직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소진할 줄 아는 사람, 구성원의 어려움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사람, 문제 해결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기득권보다 공동체의 선을 앞세우는 용기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정신을 철저한 이타주의로 강조합니다. 즉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임을 강조합니다. 자기를 태워서 발하는 빛과 자기는 녹아 사라짐으로 소금의 맛을 내는 사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본분임을 말씀합니다. 결국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위소찬이란 사자성어는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어떤 리더를 따르고 있는가? 그들은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둘째,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도 누군가에게 리더십을 행사해야 하는 자리에서 시위소찬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가?
사자성어 하나가 던지는 의미는 단순한 풍자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살리는 리더십의 본질을 성찰하게 하는 작은 거울과 같습니다. 오늘의 사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시위소찬의 자리에서 깨어나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며, 그런 지도자는 특정 지도층만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감당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위소찬을 경계하는 마음이야말로 건강한 리더십의 첫걸음이 되는 것이며, 건전한 사회발전의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