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알래스카의 가을 길 위에서 ………
올해 알래스카 가을은 평년보다 더 길게 10월 초순까지 그 아름다움을 전해줍니다. 노랗게 물든 단풍과 떨어지는 낙엽은 많은 사람들에게 살아온 인생을 한번은 뒤돌아보게 합니다.
필자가 목회자의 길을 걷기 전에 한국 정부의 국책 연구기관에 20여 년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가르침을 주신 분으로, 한국 최초의 종합 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초대 원장이셨던 고 최형섭 박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의 묘비에 적은 글이 “연구자의 덕목”이라는 5가지의 글은 지금도 마치 오래된 등불처럼 길을 잃은 이들의 앞을 조명해 줍니다.
“학문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
이 첫 번째 덕목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무거운 요청입니다.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면 학문은 허공의 성에 불과합니다. 때로는 작은 거짓이 손쉬운 길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일입니다. 연구자가 걸어야 할 길은 바른 길, 더디더라도 정직한 길이 되어야 합니다.
“부귀영화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명예와 이익은 늘 유혹처럼 연구자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는 순간, 연구는 이미 빛을 잃고 맙니다. 연구자의 손끝에서 태어나는 결과는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인류의 자산이어야 합니다. 탐구의 기쁨,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는 자각이야말로 가장 값진 보상인 것입니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 연구인이 되어야 한다.”
학문은 계절처럼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실패와 기다림 끝에, 마치 씨앗이 어둠을 뚫고 싹을 틔우듯 결실을 맺게 됩니다. 조급한 마음을 누르고 묵묵히 시간을 견디는 인내, 그것이야말로 연구자를 연구자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직위가 아니라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높은 자리를 꿈꾸지만, 그 자리가 주는 무게를 잊기 쉽습니다. 진정한 연구자는 이름 앞의 직위가 아니라, 맡겨진 역할과 책임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연구실의 불빛을 지키는 묵묵한 자세, 그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가치 있는 직위일지 모릅니다.
“아는 것을 자랑하기보다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이 마지막 덕목은 학문의 겸손을 일깨워 줍니다. 세상의 지식은 끝이 없고, 우리가 아는 것은 언제나 한 줌에 불과합니다.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할 때, 비로소 배움은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모른다는 고백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묘비애 적혀 있는 이 다섯 가지 덕목은 결국 하나의 목소리로 모아집니다. 연구자에게 있어 “연구는 삶이고, 삶은 곧 진실을 향한 겸손한 걸음이다.” 연구자가 걷는 길은 비록 고요하고 더디지만,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세상에 작은 파동을 일으킵니다.
오늘의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재촉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더 크게 알려져야 할 업적이나 성과물, 더 많은 연구비와 명성. 그러나 그럴수록 최형섭 박사의 목소리는 더 깊게 울립니다. “거짓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성실히 인내하며 시간을 견디라. 그리고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어쩌면 우리 각자의 인생길은 어느 분야이건 연구자의 삶처럼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하고 낮추며 다시 일어서는 긴 여정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가치 있고 후회 없는 인생은 삶의 어느 분야이건 이 세상의 영광을 쫓는 것이 아니라, 한 줌의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