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가을, 겨울의 문턱에서 - 백점숙

October 14, 2026 by KCN

– 알래스카의 계절이 전하는 삶의 지혜와 동포 사랑 –

벌써 가을이 왔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정신없이 산과 바다를 누비며 알래스카의 찬란한 여름을 만끽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푸르던 산자락은 황금빛 옷으로 갈아입고 높은 산봉우리에는 하얀 눈이 내려앉았다. 여름의 긴 백야가 엊그제 같은데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벌써 겨울의 문턱에 와 있음을 알려준다. 이럴 때면 문득 ‘찰나(刹那)’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영원할 것 같던 여름도 한순간에 지나가고, 눈부신 가을의 황금빛마저 머지않아 하얀 설원에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계절의 변화 앞에서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흐르는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알래스카의 가을은 유난히 짧기에 더욱 애틋하다. 자작나무 잎들이 노랗게 물들어 바람에 흩날리고, 푸른 하늘 아래 설산이 모습을 드러내면 자연은 한 폭의 수채화가 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오래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 인생과도 닮았다. 젊음의 푸르름이 어느새 인생의 가을로 접어들고, 검었던 머리칼에도 하나둘 서리가 내린다. 돌아보면 기쁨도 슬픔도, 성공도 아쉬움도 모두 찰나의 순간들이었다.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보다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며, 함께 웃을 수 있는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인생의 가을은 끝을 향한 시간이 아니라 사랑과 감사가 더욱 깊어지는 계절인지도 모른다.

이제 알래스카에는 길고 혹독한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머지않아 눈이 쌓이고 도로는 얼어붙으며 긴 어둠과 매서운 추위가 우리의 일상을 감쌀 것이다. 특히 낯선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우리 한인 동포들에게 겨울은 때로 외로움과 인내의 계절이기도 하다. 이럴 때일수록 서로의 안부를 묻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홀로 지내시는 어르신들께 전화 한 통 드리고, 몸이 불편한 이웃에게는 작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가정에는 위로와 격려를 전하자. 우리가 서로를 위해 드리는 작은 기도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긴 겨울을 견디게 하는 따뜻한 등불이 될 수 있다. 추위는 나눌 수 없지만 따뜻함은 나눌 수 있고, 겨울은 막을 수 없지만 서로의 마음만큼은 따뜻하게 지킬 수 있다.

가을은 떠나고 겨울은 오지만, 계절이 바뀐다고 우리의 사랑까지 시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을수록 우리 한인사회의 정은 더욱 깊어지기를 소망한다. 알래스카의 오로라가 어두운 밤하늘을 아름답게 밝히듯, 우리도 서로에게 작은 빛이 되어주자. 건강한 사람은 아픈 이웃을 위해, 젊은이는 어르신들을 위해, 부모는 자녀를 위해, 그리고 이웃은 이웃을 위해 기도하자. “올겨울도 부디 건강하십시오. 평안하십시오. 그리고 행복하십시오.” 이 짧은 인사가 우리 동포 모두의 가슴에 따뜻한 축복으로 남기를 바란다. 찰나처럼 지나가는 세월 속에서도 사랑은 오래 머물고, 서로를 위한 기도는 알래스카의 긴 겨울보다 더 깊고 따뜻하게 이어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