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불양수’ 는 “바다는 강물을 물리치지 않는다” 라는 사자성어입니다. 모든 것을 차별 없이 포용하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관중에 대하여 쓴 책, 관자의 “형세해”에서 유래 했다고 합니다.
바다는 깨끗한 물 더러운 물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 어떤 환경을 불사하고 바다로 흘러 들어오는 모든 강물을 받아 들입니다. 그리고 바다는 강물을 품고 바다가 되게 합니다. 바다로 흘러 들어간 물을 향해 그 누구도 강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바닷물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바다가 모든 강물을 품을 수 있고 바닷물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은 강물을 바닷물로 정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키고도 모든 강물을 품을 수 있는 넓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물을 거부하는 바다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다의 입장이 아니라 강물의 입장에서 역발상을 해 보았습니다. 강물이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강물도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만약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포기했다면 강물은 바다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강물 또한 바다로 가고자 “관철(貫徹)”하고자 하는 밀고 나감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관철(貫徹)”이란 “어떤 주장이나 방침 또는 일을 끝까지 밀고 나아가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 강물이 끝까지 바다를 향해 밀고 나아감이 있었기에 강물은 바닷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러한 강물의 밀고 나아감을 바다는 “관철(觀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관철(觀徹)은 같은 음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뜻으로 “사물을 속속들이 꿰뚫어 본다.” 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바다는 이렇듯 강물의 밀고 바다로 나아가고자 하는 뜻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에 강물을 거부하지 않고 모두 받아 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강물과 바다의 관계는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죄인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길을 보여주는 좋은 예화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라는 하나의 강 물줄기입니다. 흐르지 않는 강물은 썩게 되어 있고 공급받지 못하는 강물은 말라 없어지게 됩니다. 죄인된 강물줄기는 십자가라는 바다를 향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끝까지 밀고 나아가는 “관철(貫徹)”하고자 함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관철(觀徹)”하고 계셨기에 죄인된 우리를 은혜로 거부하지 않으시고 모두 받아 주셨습니다. 그로인해 우리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품지 못하는 죄인은 없습니다. 인생의 수고함과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모든 이들에게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게로 오라 내게로 와서 쉼음 얻으라”(마태복음 11장 28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는 참된 안식이 있고 주님안에는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주님안에 있으면 누구도 과거를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강물이 아니라 바닷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 죄인된 우리를 그렇게 품어 주셨던 것 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의 이웃들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을 차별함이 없이 구별함이 없이 그렇게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기도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받아 주시고 품어 주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받아 들일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품을 수 있는 따뜻한 그리스도의 맘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변화 되어지기를 간구합니다.
성큼 가을이 다가 옵니다. 만물이 무르익어가는 길목에서 우리의 신앙 또한 강물을 포기하지 않는 바다처럼 서로 품고 사랑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