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Shaupenhauer)’가 다시 살아났나? -앵커리지 온누리교회 서재범 목사

February 18, 2026 by KCN

한국에 방문해 서점을 둘러보았더니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열풍이 거셌다. 왜 그럴까? 당연히 그의 염세철학색채에 사람들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피곤하고 불안하고 불만스러운 세상살이 속에서 마치 정확하게 바늘로 찌르듯 정곡을 찌르는 그의 문체는 설득력이 있었다. 이미 200년도 더 지난 독일의 노철학자를 소환하는 이유는 그의 말이 그만큼 상한 한국인의 마음에 와닿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를 몇권 탐독해 보았다. 지금은 어느 정도 숙련된 목회자가 된 안경으로 그를 다시 음미해 보니 공감이 되는 부분이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틀린것도 많았다. 그는 인생의 쓴맛을 본 불우한 사람이기에 그가 기술한 인생은 날카롭고 정직했고 어두웠다. 쇼펜하우어는 사랑받지 못한 아들이자 비극적인 가정사를 겪은 목격자였고 그래서 그의 철학은 고통의 즙과 같았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개(아트만) 한 마리만을 동반자로 삼아 살았는데, 이는 어린 시절 겪은 인간관계의 파탄이 그를 얼마나 깊은 불신으로 몰아넣었는지를 보여준다. 예를들어 이런 식이다. “상대의 성격이 바뀌길 기대하는 것은 개가 양이 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사람은 자신의 성격을 바꿀 수 없다. 단지 상황에 따라 그 성격이 나타나는 방식이 달라질 뿐이다. 그것은 마치 금이 아무리 형태를 바꿔도 여전히 금인 것과 같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반드시 다시 배신하며, 한 번 비겁했던 자는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비겁해진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과도 같다.“

   그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의 변화는 본성이 바뀐 것이 아니라 본성을 억누를 만한 강력한 새로운 ‘동기'(예: 지옥에 대한 공포나 천국에 대한 열망)가 생겨 행동 방식이 일시적으로 교정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기 식으로 생각했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인간만큼 불가사의한 존재가 또 없다. 그는 정말 바뀌는지 결코 못바뀌는지 우리는 확정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인간은 얼마나 가치로운지 얼마나 형편없는지 또 선한지 악한지 그것을 단편적으로 말할 수 없다. 손자를 보며 미소짓는 할머니의 얼굴에서 ‘악마적’인 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으며, 점령당한 마을의 여자와 아이들을 학대하는 군인들의 야만적 행동에서 어떻게 ‘선함’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인간은 사악하면서도 순수하고, 착하지만 잔인하고 이기적이다. 그는 또 말한다. 고통에 대해서,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추와 같다.” 이 세상의 참모습에 대해서, “이 세계는 가능한 한 최악의 세계이다.” 도덕과 윤리에 대해서, “모든 도덕의 근거는 타인의 고통을 나의 것처럼 느끼는 동정심뿐이다.” 그리고 죽음과 구원에 대해서, “죽음이란 개별적인 자아라는 짧은 꿈에서 깨어나는 사건이다.” 하지만 다른 식으로 다시 보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 인간은 죄로 인해 망가졌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았다. 고통은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통로이다. 세상은 죄로 오염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장소이고 끝내 회복될 것이다. 타인을 향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이 끝이 아니며 구원받는자에게는 부활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