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다른 흔적들 - 새빛 다문화 센터장 김윤곤 목사

February 10, 2026 by KCN

언젠가 지인들과 각각 개인적 신앙 체험을 나누던 교제의 자리에서 인상 깊은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 고(故) 윤덕수 목사님(강북제일장로교회)은 “글을 모를 때는 그림책을 봐야 하지만, 글을 알고 나면 그림책만 계속 볼 필요가 없잖아?”라 고 하셨다. 반면 이용규 선교사님(‘내려놓음’저자)은 세대 감각이 다른 표현을 하셨다. “그림책과 동영상은 효과가 다르지요.” 두 분 모두 신앙의 성장 과정에 따라 학습 매개가 다를 수 있지만, 어느 한 요소에 머물러 균형을 잃으면 왜곡이 될 수 있다는 탁월한 표현이었다.

신앙에서 이성이 무시되면, 개인의 영적 성숙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조화에 혼돈이 일어날 수 있다. 오스왈드 챔버스도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 개인의 체험을 간증할 때, “하나님보다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여러 차례 경계한다. 교회와 공동체 영역에서는 성경 해석과 신학적 분별이 중요하기 때문에, 설교와 기독 콘텐츠가 이성적 언어로 전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신앙과 영성을 제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공동체와 개인 관계의 균형을 위함이다.

그러나 이성적 설명만으로 성도의 영성과 믿음이 해결될 수 있는가? 이해되지 않아도 믿어지는 믿음이 있고, 이해하고도 믿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신앙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논리로만 유지한다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남기신 개인적 교제의 흔적과 성령의 감동은 설명될 수 없다. 신앙은 겉으로 드러나는 언어와 구조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의 작용까지 포함하는 전인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바울 역시 지성의 도시 고린도에서 논리적 설교를 시도했지만, 그 결과를 복음적 관점에서는 실패로 평가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고 선언한다. 동시에 그는 신비 체험만을 추구하는 이른바 영적 과열 신앙에도 분명한 경계를 세운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닌다”(갈 6:17)는 그의 고백은, 외형만 보면 감정적 신비주의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복음에 대한 순종과 헌신이 종합적으로 체험된 깊이 있는 신비한 확신이었다.

각자의 체험은 개인의 신앙 여정에 맞추어진 과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도록 이끄시는 경험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며, 우리의 이성적 이해의 범주를 넘는 방식 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자리와 형편에 맞추어 주시는 은혜의 고유한 흔적이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찾아 갈 때는 과학적인 ‘인도’하심을 따라 갔지만, 돌아 갈 때는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갔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동일하신 분이지만, 사람마다 그 성장 과정에 적절하게 필요한 ‘신앙의 교재’를 다르게 사용하신다. 그래서 모든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각자의 형편에 따라 고유한 은혜의 흔적들이 있다. 각 사람이 감당할 분량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역사하시는 것이다(엡 4:7).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롬 12:3),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전 12:11).

결국 기독교 신앙은 이성, 감성, 영성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통전적 구조 위에 서 있다. 개인적 체험을 규범화 하여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이성적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영적 체험들을 배제하려는 것 역시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맞춤형으로 지시하심을 거부하는 또 다른 극단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영적 체험을 소중히 간직하며 조심스럽게 분별하되, 공동체와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이성과 질서 속에 감성과 영성이 건강해야 한다. 이를 돕기 위해, 이미 주신 말씀을 영과 혼의 역할로 깨우쳐 주시고, 확증해 주시기 위해,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 얼마나 감사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