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사역을 하면서 항상 맞닥뜨려야 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이별에 대한 마음을 추스르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표현은 아니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 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물론 우리들은 인연이라는 것을 믿지는 않습니다. 믿지 않는 분들이 말하는 그 인연 또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속에서 이루짐을 우리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일반적으로 믿음의 가족 공동체라고 합니다. 비록 혈연적 맺어짐은 없으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 다시 말해서 예수님으로 인해 만나게 된 영적 공동체이기에 일반적인 만남과 인연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은 사랑과 나눔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안에서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함께 눈물을 흘리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도하며 걸어왔던 시간이 아무리 짧다고 할지라도 시간으로 계산될 수 없는 관계의 깊음이 있습니다. 비단 교회 공동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반적인 만남과 관계를 통해서도 동일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척박한 이민의 삶을 살아오면서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치루고 섭섭하다고 돌아 섰다가 이내 다시금 돌아섭니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겨 소식을 알 수 없다가 우연찮게 만나게 되면 겸연짢게 건네는 말이 “살아 있었구려…” 그럼 “살아 있지 못 살아 있을게 뭐여!” 하고 퉁명스럽게 쏘아 붙이면 “미안하네 그려…. 우리 이제 얼마 남지 않았잖는가.. 남은 시간 아파하지 말고 웃으며 지내 보면 어떨까? 저기 저기 가서 커피 마실텐가…” 마지 못해하며 “그려 그럼세…. 오늘 내가 커피 낼 테니 그리 아셔…” 하며 서로에게 묵었던 마음의 짐들을 내려 놓으며 웃습니다. 하물며 함께 믿음의 길을 걷다가 이별을 맞이한다는 것은 그러기에 더욱 마음이 아프고 힘듬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러한 이별은 서로를 위한 축복의 시간이 되며 각자의 자리에서 더욱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게 하는 다짐의 시간으로 다져지기도 합니다. 비록 크로노스(Chronos 세상적 수평적시간 계산된 시간)의 만남의 시간은 길지 않지만 카이로스( kairos 하나님의 시간 계산할 수 없는깊은)의 시간은 끊어지지 않고 영원하기에 우리는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돌아보면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었기에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수 십년의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지속되어지는 만남이 있고 영적 동역을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을 마음에 담아두고 웃으며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의 신앙적 섬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라볼 때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다시금 다짐하곤 합니다. 말 없이 더욱 진실하게 더욱 신실하게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감이 나아 갈 수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는 것을…… 얼마남지 않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앞 두고 있다면 그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꾸어 후회함이 없이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굳음을 내려 놓고 한 걸음 다가가 웃음을 건네고 따스함 봄 내음이 다가오듯이 우리의 삶에 그러한 따스함이 피어 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는 그렇게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상황 속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향해 이 삶의 여정을 더욱 힘차게 전진 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어둠은 하루를 재촉하고 아침은 게으름을 부리고 있습니다. 개으름을 피웠던 어둠이 오히려 재촉하고 재촉하였던 아침은 오히려 게으름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변화는 세월의 흐름과 자연의 변화를 거역하지 못하고 순리에 따르게 됩니다. 일상적인 당연함이 당연함이 되지 않고 일상의 평범함이 감사한 것임에도 더 이상 감사가 되지 못하는 변화 무쌍한 삶의 한 가운데 있었던 것들이 어느새 언저리로 물러 나 앉습니다. 어쩜 우린 그렇게 살아 왔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우리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 할 지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 같지만 확실한 것은 없고 영원할 것 같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벌써 눈이 와도 몇 번을 왔을 법한데 올 해는 언제 눈이 올려는가? 하는 생각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란듯이 온 세상을 눈으로 덮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여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반나절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습다. 하늘이 심술을 부렸습니다. “여기는 알래스카야!” 라고 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듯 눈이 맘껏 내렸습니다. 우리는 이미 오랜 세월 더 많은 눈을 경험했기에 놀라지 않을 것이라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눈이 내린 길을 운전을 해 봤기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익숙하다 하면서도 그 익숙함이 때론 낮설게 여겨져 잊어 버리곤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옛적 것을 자랑하거나 뽑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매년 찾아오는 손님도 예고 없이 찾아오면 맞이할 준비가 안되어 있어 소스라치게 놀라니 말입니다. 그래서는 우리는 “이제야 오셨군요. 어서오세요.” 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그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합니다. 익숙함이 방심이 됩니다. 익숙함이 교만이 됩니다. 채족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늦으면 늦은 대로 이르면 이른 대로 무심하면서도 살짝 기다림의 마음을 보여 주며 “이제야 오셨군요. 기다렸습니다.” 하고 반가이 맞이할 수 있는 따뜻함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창가에 앉아 나뭇가지에 소복이 쌓인 눈을 보면 누군가 찾아 올 것 만 같습니다. 올 사람도 없고 기다릴 사람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벌써 와야 할 사람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벌써 왔어야 할 사람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도 그 를 기다립니다. “이제야 오시는군요…. 눈이 오니 추우니 어서 안으로 들어 오세요.” 오늘도 기다립니다. 오셔야 할 그 분을 기다립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여 줄 수 있는 그분을 기다립니다. 온 세상을 하얗게 감싸 안은 눈 처럼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덮어 줄 그 분을 오늘도 기다립니다. 여러분들도 그 분을 기다리고 계신다면 우리 함께 기다렸으면 좋겟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오신다면 “이제야 오셨군요…. “하며 반갑게 맞이 할 수 있길 바랍니다. 앵커리지 제일한인침례교회 윤현우 목사
‘해불양수’ 는 “바다는 강물을 물리치지 않는다” 라는 사자성어입니다. 모든 것을 차별 없이 포용하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관중에 대하여 쓴 책, 관자의 “형세해”에서 유래 했다고 합니다. 바다는 깨끗한 물 더러운 물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 어떤 환경을 불사하고 바다로 흘러 들어오는 모든 강물을 받아 들입니다. 그리고 바다는 강물을 품고 바다가 되게 합니다. 바다로 흘러 들어간 물을 향해 그 누구도 강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바닷물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바다가 모든 강물을 품을 수 있고 바닷물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은 강물을 바닷물로 정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키고도 모든 강물을 품을 수 있는 넓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물을 거부하는 바다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다의 입장이 아니라 강물의 입장에서 역발상을 해 보았습니다. 강물이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강물도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만약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포기했다면 강물은 바다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강물 또한 바다로 가고자 “관철(貫徹)”하고자 하는 밀고 나감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관철(貫徹)”이란 “어떤 주장이나 방침 또는 일을 끝까지 밀고 나아가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 강물이 끝까지 바다를 향해 밀고 나아감이 있었기에 강물은 바닷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러한 강물의 밀고 나아감을 바다는 “관철(觀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관철(觀徹)은 같은 음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뜻으로 “사물을 속속들이 꿰뚫어 본다.” 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바다는 이렇듯 강물의 밀고 바다로 나아가고자 하는 뜻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에 강물을 거부하지 않고 모두 받아 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강물과 바다의 관계는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죄인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길을 보여주는 좋은 예화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라는 하나의 강 물줄기입니다. 흐르지 않는 강물은 썩게 되어 있고 공급받지 못하는 강물은 말라 없어지게 됩니다. 죄인된 강물줄기는 십자가라는 바다를 향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끝까지 밀고 나아가는 “관철(貫徹)”하고자 함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관철(觀徹)”하고 계셨기에 죄인된 우리를 은혜로 거부하지 않으시고 모두 받아 주셨습니다. 그로인해 우리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품지 못하는 죄인은 없습니다. 인생의 수고함과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모든 이들에게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게로 오라 내게로 와서 쉼음 얻으라”(마태복음 11장 28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는 참된 안식이 있고 주님안에는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주님안에 있으면 누구도 과거를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강물이 아니라 바닷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 죄인된 우리를 그렇게 품어 주셨던 것 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의 이웃들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을 차별함이 없이 구별함이 없이 그렇게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기도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받아 주시고 품어 주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받아 들일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품을 수 있는 따뜻한 그리스도의 맘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변화 되어지기를 간구합니다. 성큼 가을이 다가 옵니다. 만물이 무르익어가는 길목에서 우리의 신앙 또한 강물을 포기하지 않는 바다처럼 서로 품고 사랑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